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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원주 문막읍 동화지구에는 임진왜란과 정묘호란의 역사, 일제강점기의 철도, 그리고 조선시대 고분벽화까지 층층이 쌓인 역사적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문막마을투어 '만낭골' 코스를 통해 그 깊은 이야기를 함께 들여다봅니다.

## 사한 김창일 묘역과 취병정 시문이 담긴 조선의 충절

조선이 건국된 지 약 200년이 지난 조선 중엽, 이 땅은 국가적 최대 위기를 맞이하였습니다. 임진왜란(1592~1598)과 정유재란, 정묘호란(1627)과 병자호란(1636~1637)이라는 4차례의 전쟁이 약 45여 년 동안 전국토를 뒤흔들었고, 수많은 백성이 포로가 되어 왜와 청으로 끌려갔습니다. 이러한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문막에 묻혀 있는 황무진, 사한 김창일, 행원 최동립은 각각 임진왜란과 정묘호란에 참전했던 인물들입니다.

사한(취병) 김창일은 1548년 명종 대에 태어나 84세를 향수한 인물로, 운산군수였던 김은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예조시험에 여러 번 뽑혔으나 복시에는 응하지 않다가 임진왜란이 발발한 선조 24년(1595년) 봄부터 현감과 군수로 7차례를 지냈습니다. 합천군수 재직 중에는 해주옥사로 인해 파면되기도 하였으나, 1623년 인조반정 이후 청도군수로 복직하였습니다.

정묘호란이 발발했을 때 사한 김창일은 이미 80세의 고령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주 지역에서 의병장으로 추대되어 관설 허후, 황무진과 함께 커다란 전과를 이루었습니다. 황무진은 임진왜란 당시 군에 입대하여 왜장을 사로잡는 공로로 당시 원주목사였던 한준겸의 병방(兵房)이 되어 병역 관련 업무를 담당했던 인물입니다.

난이 끝난 후 사한 김창일은 그 공로를 인정받아 선공감 첨정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인조 8년(1630년)에는 노인직으로 동지중추부사에 오르는 특전을 받았습니다. 이에 사한은 사은의 뜻으로 '왕과 국가를 다스리는 방법'에 대한 교훈을 담은 「천추오감록」을 지어 왕에게 바쳤습니다. 인조 9년(1631년) 10월에 졸하면서 문막읍 동화리 노루메 마을의 민가 뒷산에 안장되었습니다.

척암 김근공의 문화생이었던 사한은 당대 학문이 높고 시문에 능통하였으며, 재물에 욕심이 없고 깨끗한 관리였습니다. '인품이 심히 맑고 건전하며 능히 사람의 이목을 움직이는 인물'이라는 극찬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조선환여승람에 따르면 중국 명나라 사신 진좌요(陣佐堯)가 조정 관료의 소개로 김창일 선생을 찾아와 한 수의 바둑과 시문을 주고받으며 '취병정'이란 시를 지어 사한의 큰 덕을 흠모하며 칭송하였다고 전합니다.

사한이 졸한 후 후손들은 취병산 남쪽 기슭에 사당 향현사(鄕賢祠)를 지어 위패를 모시고 제향하다가, 순조 때에는 동화리에 경행사(景行祠)를 지었습니다. 이후 건등리 세골에 취병서원을 지어 위패를 모시고 제향하면서 후학들을 양성하였다고 전해집니다. 1837년 수관찰사 한상익이 썼다는 목판은 현재 마을 주민이 보관하고 있다고 합니다. 일반인이 접근하기 어려운 묘역을 직접 방문한 탐방객들 역시 "몰랐던 옛 선조님의 공덕을 알게 되어 매우 흥미롭고 기뻤다"고 소감을 전하여, 이 공간이 단순한 묘역이 아닌 살아있는 역사 교육의 현장임을 실감케 합니다.


## 동화역의 개통과 폐역, 그리고 노무현 소나무가 남긴 기억


동화역은 1937년 일본제국이 중일전쟁을 일으킨 이후, 식민지에서 착취한 물자와 전쟁 물자를 운송하기 위한 목적으로 건설한 철도 위에 1940년 4월 1일 중앙선 보통역으로 영업을 개시하며 역사를 시작하였습니다. 개통 초기 주요 화물은 석탄광산에서 사용하는 갱목 운송으로, 이는 일제 식민지 착취의 수단이었습니다.

1950년 한국전쟁으로 역사가 소실되는 비극을 겪은 동화역은 1956년 역사를 신축하며 재건되었고, 이후 전후 복구와 경제개발의 수단, 산업화의 동맥으로서 사람과 물자를 운송하며 국가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습니다. 60~70년대에는 광산으로 실려 갈 갱목이 야적장에 산더미처럼 가득하였고, 기차 시간이 다가오면 넓지 않은 맞이방은 기차를 타려는 손님과 마중 나온 이들로 북적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1970년대 자동차 산업과 도로교통 정책의 변화, 1980년대 석탄채굴 중단, 철도의 사양화로 인해 1988년 수소화물 취급이 중지되었습니다. 이후 컨테이너야드 개장(2004년), 화물취급 중지 및 여객운송 전환(2009년) 등의 과정을 거쳤으며, 2021년 1월 5일 서원주~제천 구간 복선전철화가 완료되면서 마침내 폐역이 되었습니다. 인적이 끊기면서 70여 년의 이야기도 역사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동화역 안에는 역목인 소나무와 은행나무가, 바깥에는 느티나무가 위용있게 서 있습니다. 중앙선이 처음 개통되던 1940년 4월경 한 직원이 기념으로 심었다고 전해지는 소나무와 은행나무입니다. 특히 소나무는 2007년 4월 노무현 대통령께서 특별열차로 원주에 오시는 길에 직접 열차에서 내려 "소나무가 아주 멋있게 잘 자랐다"고 찬사를 아끼지 않으시고 곁에 두지 못함을 서운해 하신 것으로 알려져 있어, 이후 이 소나무에는 '노무현 소나무'라는 별칭이 붙었습니다.

동화역을 탐방한 참여자들은 "동화역을 깨끗하게 복원해 놓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남겼습니다. 폐역이 된 공간이지만 그 안에 새겨진 근현대사의 무게와 한 그루 소나무에 얽힌 이야기는 단순한 철도 역사 이상의 감동을 전달합니다. 일제 수탈의 도구로 시작하여 산업화 시대의 동맥으로 기능하다가 조용히 문을 닫은 동화역은, 한국 근현대사의 압축판이라 할 수 있습니다.



## 노회신 벽화묘가 밝혀낸 한국 고분벽화 1,100년의 역사

2009년 4월, 원주~강릉 간 복선전철 공사를 위해 문막읍 동화3리 산68-2번지의 노회신 묘를 이장하려던 중, 약 600여 년 간의 깊은 잠에서 깨어난 유구가 발견되었습니다. 우리나라 고고학계가 흥분을 감추지 못한 이유는 명확하였습니다. 이 유구가 조선시대 벽화묘로는 두 번째로 발견된 사례였고, 더욱이 사신도와 성수도가 함께 그려진 귀한 벽화묘였기 때문입니다.

국립중원문화재연구소는 21일 간의 발굴조사를 실시한 후 「원주 동화리 노회신벽화묘 발굴조사보고서」(2009년 11월)를 발표하였습니다. 보고서에 따르면 노회신의 벽화묘 발굴은 고구려 안악3호분으로부터 시작된 사신도 벽화묘가 조선의 노회신묘까지 이어지는, 한국 고분벽화의 역사가 최소한 1,100년 간 지속되었음을 입증하는 데 큰 의의를 두었습니다.

노회신 벽화묘는 두 개의 석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제1호 석실에는 사신과 십이지신상이 그려져 고려시대의 전통을 잇고 있는 반면, 제2호 석실은 사신만 그려져 있어 고려보다는 고구려 후기와 백제의 고분벽화에서 볼 수 있는 형식을 따르고 있어 조선시대 벽화묘로는 오히려 특이한 예에 해당한다고 평가받습니다.

노회신은 태종 15년(1415년)에 태어나 세조 2년(1456년) 41세로 세상을 떠난 인물로, 고려의 노물재의 장자입니다. 노물재의 처인 심씨는 세종대왕의 장인인 심온의 셋째딸로, 노회신의 모친과 세종대왕의 왕후인 소헌왕후는 자매지간입니다. 즉 노회신은 세종대왕의 외조카인 것입니다. 적자가 없었던 노회신은 세종의 여덟 번째 아들인 영흥대군(후에 영웅대군으로 불림) 이염을 양자로 들이기도 하였습니다.

화성 사람이었던 최동립과 마찬가지로, 노회신의 묘가 강원도 문막에 자리하게 된 것도 흥미로운 인연입니다. 원주 목사로 부임하게 된 김탄행이 길가에서 석물은 훌륭하나 풀이 우거져 폐묘처럼 보이는 묘소를 발견하고 직접 벌초를 해 주었고, 그날 밤 꿈에 관복을 입은 사람이 찾아와 감사의 뜻으로 묘자리를 알려 주었다는 이야기가 문막읍사에 전해집니다.

현재 노회신 벽화묘는 문화재보존과학센터에서 보존처리를 마치고 가로세로 2~4m 크기의 화강암 석재 10여 개가 원주역사박물관 하역장에서 밀폐된 채 보관 중입니다. 문화재청의 국가귀속 거부 이후 2012년 원주역사박물관으로 이관되었으나, 소장고가 무너질 정도의 무게로 인해 나무박스로 포장된 채 밀폐되어 있어 실제 크기를 가늠할 수 없고 모형조차 제작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노회신 묘와 묘비는 노씨 문중에 의해 충남 청양군 정양응 적루리 도봉산으로 이장되었으며, 이장 전의 노회신 묘터에는 현재 원주~강릉 간의 중앙선이 관통하고 있습니다. "벽화묘 노회신 이야기를 통해 문막읍의 연결 스토리를 다시 한번 알게 되었고, 문막 역사에 관심을 갖는 계기가 되었다"는 탐방객의 비평은 이 유적이 지닌 역사적 가치를 여실히 드러냅니다.


문막 동화지구의 만낭골 코스는 단순한 마을 산책로가 아닙니다. 사한 김창일의 충절과 학문, 동화역이 품은 근현대의 애환, 그리고 노회신 벽화묘가 증명하는 1,100년 고분벽화의 역사가 한데 어우러진 살아있는 역사 현장입니다. "문막이라는 곳에 역사적인 곳도 많고, 멋있는 곳도 많다"는 탐방객들의 소감처럼, 문막마을투어는 계속해서 이어 나가는 탑방이 되어야 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