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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저는 문막에 살면서도 이 동네에 이런 이야기들이 숨어 있는지 전혀 몰랐습니다. 조선의 국경선을 결정지은 인물의 묘역이 걸어서 닿을 거리에 있고, 봉황이 깃든 길 바라며 오동나무를 심었다는 폐사지가 수목원 뒷길에 숨어 있다니요.
문막 동화지구 마을투어에 참여해서 처음으로 마주한 이야기들을 기록해둡니다.

박권과 백두산정계비 — 우리 동네 어른이 국경선을 그었다고?
투어 해설사가 "이분 묘역이 문막에 있습니다"라고 했을 때, 제가 처음에는 반신반의했습니다. 조선 숙종 대에 형조·이조·병조·예조 판서를 두루 거친 인물이, 그것도 백두산정계비(白頭山定界碑) 체결의 당사자가 이 작은 마을과 연결된다는 게 쉽게 실감이 나지 않았거든요.
귀암(歸庵) 박권(1658~1715)은 1686년 과거 급제 후 30여 년간 고위 관직을 두루 거쳤습니다. 그의 호 '귀암'은 '초막으로 돌아가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귀암이라는 호가 의미하는 바는 단순한 낭만이 아닙니다. 언제든 관직을 내려놓고 초야에 묻히겠다는 의지를 이름에 새겨 넣은 셈인데, 실제로 그는 왕에게 직언과 상소를 서슴지 않았고 유배를 당하면서도 부정과 타협하지 않은 인물로 기록됩니다.
그런 박권을 숙종이 1712년 접반사(接伴使)로 임명합니다. 접반사란 외국 사신을 공식적으로 맞이하고 교섭하는 역할을 맡은 관리를 말합니다. 쉽게 말해 오늘날의 국가 간 협상 대표에 해당하죠. 상대는 청나라 오라총독 목극등이었고, 의제는 조선과 청의 국경선 확정이었습니다.
당시 조선인들이 두만강을 건너 청의 봉금지대(封禁地帶)—청이 자국 발상지로 규정하고 민간인 출입을 엄격히 금지한 구역—에서 산삼을 캐고 농사를 짓는 일이 반복되면서 분쟁이 잦아졌습니다. 이에 양국은 백두산 현지에서 공동 조사를 벌여 비석에 국경선을 새기기로 합니다. 그 결과물이 바로 "서위압록 동위토문(西爲鴨綠 東爲土門)", 즉 서쪽은 압록강, 동쪽은 토문강을 경계로 삼는다는 내용을 담은 백두산정계비입니다(1712년 5월 15일).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하나 터집니다. 박권 본인이 백두산 정상까지 오르지 못한 겁니다. 숙종실록에는 사헌부가 박권과 함경도 관찰사 이선부를 파직 청원한 기록이 남아 있는데, 그 이유가 "몸이 늙고 쇠약하다는 핑계로 직접 현장에 오르지 않고 역관 김경문만 목극등과 동행하게 했다"는 것이었습니다(출처: 조선왕조실록 디지털 아카이브).
더 결정적인 문제는 비석을 세운 위치에서 비롯됩니다. 목극등이 토문강의 발원지로 지목한 물줄기가, 알고 보니 두만강이 아닌 송화강(松花江) 쪽으로 흘러가는 지류였던 것입니다. 이 사실이 뒤늦게 드러나면서 '토문강=두만강'이냐 '토문강=송화강 지류'냐를 놓고 약 160년 뒤 조선과 청 사이에 감계회담(勘界會談)이 열립니다. 감계회담이란 국경선 경계를 다시 조사하고 확인하기 위해 양국이 공식 대표를 파견해 여는 회담을 뜻합니다.
1885년과 1887년 두 차례 열린 감계회담에서 조선 대표 이중하는 "토문은 두만강이 아닌 송화강 지류"라고 주장했지만 회담은 결렬됩니다. 그리고 1905년 일본이 조선의 외교권을 빼앗은 뒤 청과 맺은 간도협약으로 간도가 청에 넘어가면서 지금의 국경선이 확정되었습니다. 백두산정계비 자체는 1931년 7월 만주사변 직후 일제에 의해 철거되어 현재는 탁본으로만 남아 있습니다.
투어에서 이 흐름을 다 듣고 나서 제가 든 생각은 단 하나였습니다. 만약 박권이 그날 직접 백두산 정상에 올랐다면, 물줄기 방향을 현장에서 확인했다면, 역사가 조금 달라졌을까요?
- 백두산정계비 비문 핵심: "서위압록(西爲鴨綠) 동위토문(東爲土門)" — 서쪽은 압록강, 동쪽은 토문강을 경계로 한다
- 핵심 쟁점: 토문강이 두만강인가, 송화강 지류인가 — 이 해석 차이가 간도 영유권 분쟁의 씨앗이 됨
- 박권 묘역: 현재 문막읍 호적길 10(동화리) 부친 묘역 아래 안장됨
- 백두산정계비: 1931년 철거, 현재 탁본만 존재

옛 동화 사지 와 벽계수 이종숙 — 폐사지에 남은 것들이 왜 이렇게 마음에 걸릴까요
동화수목원 제2주차장 끝에서 계곡을 건너 안내 리본을 따라 오르다 보면 능선 아래 넓은 공터가 하나 나옵니다. 처음 거기 섰을 때 제가 느낀 건 기대와 당혹감이 반반이었습니다. '절터'라기에 뭔가 있을 줄 알았는데, 돌무더기와 와편(瓦片)—기와 파편—만 흩어져 있었거든요. 그런데 해설사의 설명을 들으며 조금씩 그 공간이 달리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옛 동화사(桐華寺)는 신라 말 창건된 것으로 전해지며, 조선 초에는 단종의 생육신(生六臣)—왕위를 빼앗긴 단종을 위해 벼슬을 버리고 절개를 지킨 여섯 신하—중 한 명인 매월당 김시습이 머물렀다고 합니다. 서원주 지역 4대 사찰 중 하나였던 이 절은 한때 거석 축대와 사리를 안치한 부도탑(浮屠塔)이 있던 큰 규모였다고 하는데,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탑과 주요 석조물들을 여러 날에 걸쳐 반출해 갔다고 전해집니다(출처: 한국문화원연합회).
그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켜켜이 쌓인 돌과 바위들, 오동나무 두세 그루, 그리고 일본인들이 만들어 놓은 것으로 보이는 시멘트 구조물 하나. 보존과 반출이 뒤섞인 채 방치된 공간이었습니다.
이 절터에는 두 가지 전설이 전해옵니다. 첫 번째는 봉황 이야기입니다. '봉황이 울었다'는 뜻의 명봉산(鳴鳳山) 자락에 봉황이 깃들기를 바라며 오동나무를 많이 심었는데, 수백 년이 지나 나무가 절을 덮자 주지승이 오동나무를 베라 명했습니다. 마지막 큰 오동나무를 쓰러뜨리는 순간 오음(五音)의 처절한 울음소리와 함께 봉황이 솟구쳐 오르고 나무에서 핏물이 흘렀다는 이야기입니다. 이후 빈대가 기승을 부려 주지스님마저 절을 떠났다고 하죠.
두 번째는 큰스님과 빈대 이야기로, 천 년 묵은 빈대가 큰스님의 기운이 쇠약해질 때를 기다려 싸움을 걸고 결국 절을 폐사시켰다는 내용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짚고 싶은 게 있습니다. 전국적으로 '빈대 때문에 절이 망했다'는 폐사 전설이 유독 많습니다. 빈대는 사찰을 직접 훼손할 힘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빈대가 상징하는 건 무엇일까요. 조선의 억불숭유(抑佛崇儒) 정책—불교를 억누르고 유교를 높이는 정책—하에서 사찰을 압박하고 훼손한 유림(儒林) 세력을 직접 지칭하기 어려우니 돌려 '빈대'라 불렀다는 해석이 있습니다. 제가 직접 듣고 보니 이 해석이 상당히 설득력 있게 느껴졌습니다.
한편 동화리에는 또 다른 인물의 묘역도 있습니다. 벽계수(碧溪水) 이종숙(1508~?)은 세종의 증손자로, 유년 시절 조광조에게서 수학했습니다. 12세 때 기묘사화(己卯士禍)—1519년 조광조를 중심으로 한 신진 사림파가 훈구파에 의해 제거된 정치적 대숙청—를 맞아 가문이 화를 입었고, 이후 평생을 시문과 음율로 보내다 자손에게 "관직에 나아가지 말고 당쟁에 오르내리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합니다. 벽계수 묘역은 원래 경기도 시흥에 있었으나 1985년 토지수용으로 현재의 문막읍 호적길로 이장되었습니다.
이 분의 이름 '벽계수'가 낯설지 않은 분도 계실 텐데, 황진이의 시조 "청산리 벽계수야 수이 감을 자랑마라"의 그 벽계수가 바로 이 사람입니다. 황진이가 "한번 넓은 바다에 다다르면 청산으로 돌아오기 어려우니, 밝은 달 가득한 이 밤에 쉬어 감이 어떠냐"며 시조를 읊자, 벽계수가 그만 나귀에서 떨어졌다는 일화는 지금 읽어도 웃음이 납니다. 살짝살짝 야생화와 눈 맞추며 걷는 투어 길에서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 이 동네가 갑자기 다르게 보였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백두산정계비는 지금 어디서 볼 수 있나요?
A. 안타깝게도 백두산정계비 원본은 1931년 7월 만주사변 직후 일제에 의해 철거되어 현재 실물을 확인할 수 없습니다. 일본인 시노다 지사쿠가 쓴 저서 서문에 "1931년 7월 28일 없어졌다"는 기록이 남아 있으며, 현재는 탁본만 전해집니다.
Q. 귀암 박권 묘역은 일반인도 방문할 수 있나요?
A. 묘역 자체는 문막읍 호적길 10(동화리 1479) 인근에 위치해 있지만, 투어 참여자들의 공통된 의견은 "이정표와 진입로 정비 없이는 혼자 찾기 어렵다"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투어 당일에도 진입로가 불명확해서 해설사 안내 없이는 지나쳤을 것 같았습니다. 방문 전 마을 관련 기관에 문의해 보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Q. 옛동화사지는 어떻게 찾아가나요?
A. 동화수목원 제2주차장에서 계곡을 건너 등산로를 따라 오르다 안내 리본을 따라 오른쪽 계곡을 건너면 능선 아래 넓은 공터가 나옵니다. 다만 안내 리본과 이정표가 충분하지 않아 처음 방문자에게는 쉽지 않은 길입니다. 마을투어 프로그램을 통해 해설사와 함께 방문하는 것이 가장 확실합니다.
Q. 황진이 시조 '청산리 벽계수야'의 벽계수가 실제 인물인가요?
A. 네, 실제 인물입니다. 벽계수(碧溪水)는 세종의 증손자 이종숙의 호로, 황진이와의 일화는 당대 시인 손곡 이달이 중간에서 "거문고를 타며 유혹하라"고 조언한 내용까지 포함해 여러 문헌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벽계수 이종숙의 묘역은 현재 문막읍에 있습니다.
Q. 간도는 지금도 우리 영토를 주장할 수 있는 근거가 있나요?
A. 1905년 을사늑약으로 조선의 외교권을 빼앗은 일본이 1909년 청과 맺은 간도협약을 통해 간도를 청에 넘겼는데, 이 협약 자체가 조선의 동의 없이 체결된 무효 조약이라는 주장이 국내 학계 일부에서 제기되고 있습니다. 다만 이 문제는 현재 국제법적·외교적으로 매우 복잡한 사안이므로, 단순히 유효·무효를 단정하기 어렵습니다.
결론
투어를 마치고 나서 제가 가장 오래 생각한 건 "왜 이걸 몰랐을까"였습니다. 문막에 오래 살면서도 이 마을이 조선의 국경선 역사와 연결되고, 황진이 시조의 주인공 묘역이 근처에 있고, 폐사 전설 하나에 정치적 탄압의 기억이 담겨 있다는 걸 전혀 몰랐습니다. 이번 투어 참가자 전원이 만족도 5점 만점을 준 데는 다 이유가 있었습니다.
한 가지 아쉬운 점도 솔직히 적어둡니다. 귀암 박권 묘역과 옛동화사지 모두 이정표와 진입로 정비가 부족합니다. 투어 참가자들 사이에서도 "봉사단체와 연계한 정기적 관리", "이정표와 안내 리본 설치", "동화수목원·현 동화사와의 협력 관리" 필요성이 공통으로 나왔습니다. 민간이든 공공이든 누군가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져주지 않으면 이 이야기들이 정말 사라질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글이 그 관심의 작은 시작이 되었으면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