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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저는 문막에 살면서도 이 땅에서 의병이 싸웠다는 사실을 거의 몰랐습니다. 마을투어에 따라 나섰다가, 100여 년 전 이 골목과 저 산등성이에서 실제로 총소리가 났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서야 제가 얼마나 무심하게 살았는지 실감했습니다. 문막의 의병활동과 1919년 독립만세시위, 그리고 그 중심에 있었던 이은찬 의병장의 이야기를 제가 직접 들은 방식 그대로 풀어보겠습니다.

의병활동: 문막 땅에 새겨진 저항의 기록
투어 해설을 들으면서 제가 가장 먼저 놀란 건 연표였습니다. 1896년부터 1908년까지, 문막 일대에서 의병과 일본군 사이의 교전 기록이 여러 차례 남아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1907년 9월 22일에는 의병 약 100명이 문막 부근에서 일본군과 공방전을 벌였고, 이듬해인 1908년에도 2월, 4월, 7월 세 차례나 교전이 이어졌습니다. 이 수치들은 문막읍사(2005년)에 기록된 팩트입니다.
이 의병 활동들은 크게 세 시기로 구분됩니다. 첫 번째는 을미의병(乙未義兵)으로, 1895년 명성황후 시해와 단발령에 반발해 일어난 봉기입니다. 여기서 을미의병이란 을미년(1895년)에 일어난 의병을 뜻하며, 위정척사(衛正斥邪) 사상, 즉 성리학적 질서를 지키고 외세를 배척하자는 이념이 그 뿌리에 있었습니다. 두 번째는 을사의병(乙巳義兵)으로, 1905년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강제로 빼앗긴 을사조약 체결에 맞서 일어난 구국운동입니다. 세 번째이자 가장 규모가 컸던 정미의병(丁未義兵)은 1907년 고종황제의 강제 퇴위와 군대 해산을 계기로 전국적으로 확산된 무장 저항입니다.
이 정미의병의 핵심 인물이 바로 문막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는 이은찬(李殷瓚, 1878~1909) 의병장입니다. 판부면 관설에서 태어난 그는 정조의 10남 덕천군의 후손으로, 을미의병부터 시작해 14년간 의병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제가 투어에서 가장 깊게 파고든 부분이 바로 이 인물의 행적이었는데, 들으면 들을수록 32세라는 나이가 너무 짧게 느껴졌습니다.
이은찬은 1907년 해산된 군인 80여 명을 포함해 500명의 의병을 모집했고, 전국 13도 창의군(倡義軍), 즉 나라를 위해 의(義)를 들어 일어선 연합 의병부대를 조직하는 데 핵심 역할을 했습니다. 원수부 13도 총대장으로 이인영을 추대하고 본인은 중군대장(中軍大將), 즉 연합부대 전체 전력을 총괄하는 지휘관 자리를 맡았습니다. '서울진공작전'에서 선발대 300명이 동대문 밖 12km 지점까지 진격하는 성과를 거두었지만, 총대장 이인영이 부친상으로 전선을 이탈하면서 작전은 결국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그 이후의 행적도 놀랍습니다. 작전 실패 후에도 이은찬은 남은 병력 500명을 이끌고 경기도와 황해도 각지에서 2년을 더 싸웠습니다. 1909년 3월 31일, 밀정의 유인작전에 속아 용산역 앞에서 일본헌병에게 체포된 뒤 경성지방재판소에서 사형을 선고받았고, 같은 해 6월 16일 32세의 나이로 처형되었습니다. 그의 공훈은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으로 추서되었습니다(출처: 국가보훈부 공훈전자사료관).
- 을미의병(1895~): 명성황후 시해·단발령에 반발, 위정척사 이념 기반
- 을사의병(1905~): 을사조약으로 외교권 박탈에 맞선 구국 봉기
- 정미의병(1907~): 고종 강제 퇴위·군대 해산 계기로 전국 확산, 13도 창의군 조직
- 문막 일대 교전 기록: 1907년~1908년 사이 최소 4차례 공식 기록 확인
- 이은찬 의병장: 판부면 출신, 13도 창의군 중군대장,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 추서

독립만세시위: 봉화와 태극기, 그리고 남겨진 이름들
투어에서 두 번째로 발걸음을 옮긴 곳은 1919년 문막의 독립만세시위 현장이었습니다. 제가 직접 그 지형을 보면서 처음으로 이해한 게 있었는데, 문막의 낮고 완만한 산들이 봉화(烽火)를 올리기에 얼마나 좋은 조건인지였습니다. 봉화란 불과 연기를 피워 멀리 떨어진 곳에 신호를 전달하는 전통적인 통신 수단입니다. 산마다 불이 오르면 인근 마을이 즉각 연결될 수 있는 구조였던 것입니다.
1919년 3월 27일 노림리에서 시작된 독립만세시위는 열흘 남짓 지나 문막 일대 전역으로 번졌습니다. 일제 측 판결문에 따르면 문막의 시위는 4월 8일 장날을 기점으로 11일까지 이어졌습니다. 반계리, 궁촌리, 문막리, 동화리의 산마다 밤마다 봉화가 올랐고, 이를 진압하려는 일본군의 총소리와 만세 소리가 뒤엉켰다고 합니다. 제가 이 부분을 들었을 때, 그 장면이 얼마나 극적이고 또 두려웠을지 상상이 잘 안 됐습니다.
이 시위에서 처벌을 받은 인물들의 기록이 판결문으로 남아 있습니다. 반계리의 곽한선 지사는 주민 100여 명을 규합해 봉화를 올리고 만세를 외치다 체포되어 보안법(保安法) 위반으로 징역 2년을 선고받았습니다. 보안법이란 일제가 식민 통치에 저항하는 조선인을 처벌하기 위해 적용한 치안 관련 법령으로, 독립운동 참가자 대부분이 이 조항으로 기소되었습니다. 곽한선 지사는 1983년 국민훈장 애족장에 추서되었습니다(출처: 독립기념관 독립운동가 공훈록).
궁촌리에서는 김현구(30세, 농업)가 포목으로 태극기를 직접 만들어 시위를 이끌었습니다. 판결문에 실린 그의 심문 기록을 보면, 구장(현재의 이장)에게도 만세를 부르라고 강요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징역 1년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했습니다. 같은 마을 유인수(32세)는 판결문에서 "문막 시장에서 술에 취해 쉬고 있다가 만세 소리를 듣고 달려갔더니 50~60명이 모여 있었다"고 진술했습니다. 제가 이 진술을 듣고 묘하게 마음이 움직였던 건, 거창한 결심 없이 그냥 소리를 듣고 달려간 평범한 사람들이 역사를 이뤘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궁촌리 서석골의 최재희(46세)는 4월 8일 밤 10시경 밭 가운데서 주민 20여 명과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불렀고 징역 8개월을 선고받았습니다. 문막공립보통학교 학생이었던 허명동, 구태운, 채수은은 퇴학과 정학으로 학업을 잃었습니다. 어린 학생들까지 처벌을 받았다는 사실이, 당시 시위가 얼마나 넓게 퍼졌는지를 보여줍니다.
투어에 참가한 분들 전원이 내용 이해도와 만족도 모두에서 최고점을 응답했다고 했는데, 저도 그 결과가 전혀 과장이 아니라고 느꼈습니다. 해설사분의 설명이 판결문 원문까지 인용하며 진행되었기 때문에, 그냥 역사 강의가 아니라 증거를 직접 보는 경험에 가까웠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이은찬 의병장은 원주 사람인가요, 문막 사람인가요?
A. 이은찬 의병장은 현재 원주시 판부면 관설(포진리)에서 태어났습니다. 문막읍과 판부면은 모두 원주에 속하는데, 당시 행정 구역 기준으로 보면 그는 문막 일대에 연고를 둔 인물입니다. 정미의병을 원주에서 처음 일으킨 인물로, 원주와 문막 양쪽 모두의 역사로 볼 수 있습니다.
Q. 을미의병, 을사의병, 정미의병은 어떻게 다른가요?
A. 세 의병 운동은 각각 다른 계기로 일어났습니다. 을미의병(1895년)은 명성황후 시해와 단발령이 직접적인 원인이었고, 을사의병(1905년)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긴 을사조약 체결에 맞서 일어났습니다. 정미의병(1907년)은 고종황제 강제 퇴위와 군대 해산을 계기로 가장 조직적이고 전국적인 규모로 확산되었습니다. 문막에는 이 세 시기 모두의 흔적이 기록으로 남아 있습니다.
Q. 문막의 독립만세시위는 언제, 어디서 일어났나요?
A. 1919년 4월 8일 장날을 기점으로 11일까지, 반계리·궁촌리·문막리·동화리 일대의 산과 들에서 동시다발로 일어났습니다. 밤마다 봉화가 오르고 만세 소리가 울렸으며, 일제 판결문에 이름이 기록된 주민만 해도 곽한선, 김현구, 유인수, 최재희 등이 있습니다.
Q. 문막에 의병이나 독립운동 관련 기념 시설이 있나요?
A. 현재 문막에는 별도의 기념비나 기념 공간이 마련되어 있지 않습니다. 인근 안창리 지역의 을미의병봉기기념탑, 부론면의 독립만세기념비, 귀래면의 3.1공원 등 다른 지역과 비교하면 아쉬운 부분입니다. 마을투어 참가자들 사이에서도 문막만의 기념비 설립과 교육 활용 공간 마련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모아졌습니다.

결론
이번 마을투어를 마치고 나서 제가 계속 머릿속에 맴도는 장면은, 32세의 이은찬이 처형대에서 미소를 띠며 "나는 죽어도 내 눈은 썩지 않고 너희가 망하는 꼴을 볼 것이다"라고 말했다는 대목입니다. 그로부터 37년 뒤 1945년 8월 15일, 그 확신은 현실이 되었습니다. 저는 이 사실 하나를 곱씹는 것만으로도 이번 투어가 충분히 가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원주에 세워진 이은찬 의병장 추모비가 관리가 다소 미흡하다는 이야기도 투어 중에 나왔는데, 저도 직접 확인하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문막에는 아직 의병과 독립운동을 기념하는 공간이 없습니다. 다른 지역처럼 기념비 하나가 서 있다면, 그 앞에서 잠깐 멈추는 사람들이 생겨날 것이고, 그게 쌓이면 이야기가 되고 마을의 정체성이 됩니다. 저는 그 첫 걸음이 조금 더 빨리 이루어졌으면 하는 생각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