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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저는 문막에 이런 역사가 숨어 있는 줄 몰랐습니다. 견훤과 왕건이 바로 이 동네 섬강 일대에서 8개월 넘게 일진일퇴를 거듭했다는 사실, 마을투어에 참여하기 전까지는 그냥 지나쳤던 이야기입니다. 직접 견훤산성 터에 서서 문막 들판을 내려다봤을 때, 뭔가 등골이 서늘해졌습니다. 교과서 한 줄로 지나쳤던 후삼국시대가 갑자기 눈앞에 살아나는 느낌이었습니다.

후삼국시대, 견훤은 왜 이 길을 선택했을까
마을투어 해설을 들으면서 제가 가장 먼저 고쳐야 했던 선입견이 하나 있었습니다. 견훤 하면 무자비하고 포악한 군주라는 이미지가 먼저 떠오르는데, 사실 그 출발점은 꽤 다른 곳에 있었습니다.
견훤은 867년 지금의 경북 문경 가은현에서 태어났습니다. 호족 출신인 아버지 아자개의 아들이었지만, 15세에 스스로 가족 곁을 떠나 신라 군사가 됩니다. 그리고 아버지 성인 '이(李)'씨를 버리고 '견(甄)'씨를 자신의 성으로 삼았습니다. 여기서 '견(甄)'이란 '질그릇을 만드는 장인'을 뜻하는 글자입니다. 조선의 역사학자 안정복은 『동사강목』에서 이 성이 쓰일 때는 '진'으로 읽혀야 한다고 했습니다. 귀족의 아들이 스스로 비천한 직업을 상징하는 성을 택했다는 게 처음에는 이해가 안 됐는데, 해설을 듣고 나서야 맥락이 잡혔습니다. 견훤은 자신의 정체성을 '아버지의 아들'이 아닌 '200년 전 멸망한 백제의 후손'에 두고 있었던 것입니다.
신라 말기의 사회 구조를 이해하면 견훤의 선택이 더 선명하게 보입니다. 당시 신라에는 골품제(骨品制)라는 신분 질서가 작동하고 있었습니다. 골품제란 혈통에 따라 관직, 집의 크기, 사용할 수 있는 그릇과 수레의 재료까지 모두 정해놓은 엄격한 계층 제도입니다. 아무리 당나라 유학을 마치고 빈공과에 합격한 인재라도 6두품 이하라면 중앙 정치 무대에 발을 들여놓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 불만이 쌓이고 쌓여 지방 호족 세력과 결탁하면서 신라의 중앙 통제력은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혜공왕 이후 150년 동안 왕이 20번 넘게 바뀌었다는 사실이 이를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해설사가 『삼국사기』의 구절을 소개할 때 저도 받아 적었습니다. "아첨하는 소인들이 왕의 곁에서 정권을 농간하니, 기강은 문란해 해이해지고 기근이 겹쳐 백성들이 유리하고 도적들이 벌떼같이 일어났다"는 기록입니다. 경주는 사계절 내내 풍악이 넘쳤고 민가도 모두 기와지붕에 밥도 숯으로만 지었다고 하니, 수도와 지방의 온도 차가 얼마나 심했는지 짐작이 갑니다. 892년, 25세의 견훤은 무진주(지금의 광주 일대)에서 마침내 신라에 반기를 들었습니다. 궁예가 군사 3,500명을 모으는 데 10년이 걸린 반면, 견훤은 한 달 만에 5,000명이 몰려들었습니다. 민심이 어디로 향하고 있었는지를 숫자로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견훤 옆에는 책사였던 6두품 출신의 최승우가 있었습니다. 6두품이란 신라 골품제에서 진골 바로 아래 등급으로,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도 중앙 고위직에는 오를 수 없었던 계층입니다. 최승우는 역사 기록의 중요성을 견훤에게 일깨운 인물로 전해집니다. 그 덕분인지 후백제의 수도 완산주(전주)에는 당시 한반도에서 가장 큰 도서관이 세워졌고, 견훤이 점령지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한 일 중 하나가 책을 수집하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이 도서관이 불타지 않고 남았더라면 우리 고대사의 판도는 달랐을 것이라는 생각을 지금도 자주 합니다.
- 골품제: 혈통에 따라 관직·생활 규모 전부를 제한한 신라 신분 제도
- 6두품: 진골 바로 아래 등급, 아무리 유능해도 고위직 진출 불가
- 빈공과: 당나라 유학생을 대상으로 한 과거 시험, 합격해도 귀국 후 신분 장벽 존재
- 견훤의 군사력: 무진주 기병 한 달 만에 5,000명 집결 — 민심의 방향을 보여주는 수치
- 완산주 도서관: 한반도 최대 규모, 후백제 패망 시 소실



견훤산성과 문막전투 — 역사가 묻힌 자리에 서다
제가 직접 견훤산성 터에 올라봤을 때 솔직히 처음엔 조금 실망했습니다. 성벽이라 부를 만한 것은 거의 남아 있지 않고, 풀과 나무 사이로 돌무더기 흔적만 남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해설을 들으면서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1986년 원성군수 명의로 세워진 문막견훤성지(文幕甄萱城址) 표지석에는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신라말기 후삼국시대인 920년경, 북방으로 세력을 확장하던 후백제의 견훤이 이곳에 성을 쌓고 후에 고려 태조가 되는 왕건과 싸우던 곳이다." 이 돌판 하나가 그 자리를 버텨주고 있었습니다.
국방일보(2021년 9월 15일자)에 따르면 899년 10월부터 900년 4월까지 약 8개월 동안 문막의 섬강을 끼고 견훤과 왕건은 일진일퇴의 전투를 벌였습니다(출처: 국방부 국방일보). 이때 견훤은 이미 스스로 왕을 칭하고 있었고, 왕건은 여전히 궁예 휘하의 장수였습니다. 병력과 거점 면에서 왕건은 여러모로 열세였습니다.
왕건이 이 열세를 뒤집은 방식이 흥미롭습니다. 밤사이 섬강에 백회(白灰)를 풀어 쌀뜨물처럼 보이게 해 대군이 주둔하는 인상을 줬고, 건등산 뒤 억새를 베어 만든 허수아비를 견훤의 방어진지 앞에 늘어세웠습니다. 그리고 기병대를 섬강 방향이 아닌 천마산 고갯길로 우회시켜 견훤 진영의 측면을 유린했습니다. 이 기만전술(欺瞞戰術), 즉 적의 판단을 흐리도록 허위 정보와 위장을 활용하는 전략이 결국 전세를 뒤집었습니다. 견훤은 견훤산성을 내주고 전주까지 후퇴했고, 왕건은 중부 지역 주도권을 쥐게 됩니다.
건등산 왕건진(王建陣)에는 성의 흔적이나 건물 터가 전혀 남아 있지 않습니다. 이곳은 왕건이 견훤 군대를 관찰하고 방어하기 위해 임시로 진을 쳤던 자리로 보이며, 수십 년 전까지만 해도 창검 조각이나 화살촉이 발견됐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 유물들을 보관하거나 관리하는 곳은 현재 없습니다. 이게 제가 마을투어를 다녀온 뒤 가장 아쉬웠던 부분입니다. 조선 중기 삼당시인(三唐詩人)의 한 사람이었던 손곡 이달이 이 전투를 시로 남겼고, 그 시비가 2001년 건등산 초입에 세워져 있다는 것만으로 그나마 위안을 삼아야 할 것 같았습니다.
마을투어 참여자들의 반응도 인상적이었습니다. 2025년 4회차 투어에 참여한 5명을 대상으로 리커트 방식으로 설문한 결과, 견훤의 성장과 문막 전투 설명에 대한 만족도는 표준편차 0.0, 평점 100점이었습니다(참고: 주민자치위원회 설문 결과, 2025 문막읍마을투어). 참여자 중 80%는 2024년에도 같은 투어에 참여한 사람들이었습니다. 한 참여자는 "우리 마을에 이런 역사가 있는 줄 몰랐다"고 했는데, 그 말이 제 마음을 그대로 대변해줬습니다.
제 경험상 이런 현장 역사는 한 번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면 길을 걸을 때도 달리 보입니다. 섬강변을 지날 때마다 이제는 억새밭이 다르게 보이고, 건등산 능선이 왠지 낯설지 않습니다. 탐방로 정비와 역사공원 조성이 필요하다는 참여자들의 제안이 단순한 바람이 아니라 절실한 요청처럼 들린 이유도 그래서입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견훤산성은 지금도 직접 가볼 수 있나요?
A. 네, 강원도 원주시 문막읍 포진리 일대에 위치해 있으며 현재도 방문은 가능합니다. 다만 성벽 대부분이 허물어진 상태라 별도 안내 없이는 흔적을 알아보기 어렵습니다. 1986년에 세워진 문막견훤성지 표지석이 위치를 알려주는 유일한 표지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Q. 견훤이 성을 '이(李)'씨에서 '견(甄)'씨로 바꾼 이유가 뭔가요?
A. 조선 학자 안정복의 분석에 따르면 '견(甄)'은 질그릇 장인을 뜻하는 비천한 성씨입니다. 견훤이 이 성을 스스로 택한 것은 아버지 아자개의 신라 귀족 계보를 부정하고, 자신을 멸망한 백제의 후손으로 재정의하려는 의도로 해석됩니다. 문경 가은 아차마을의 설화에도 백제 유력 가문의 후손이 이곳으로 흘러들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Q. 문막 마을투어는 누구나 참여할 수 있나요?
A. 2025 문막읍 마을투어는 문막읍 주민자치위원회에서 운영하는 마을의제사업의 일환입니다. 현재는 연간 회차를 나눠 진행되고 있으며, 재참여율이 80%에 달할 만큼 만족도가 높습니다. 정확한 일정과 참여 방법은 문막읍 주민자치위원회를 통해 확인하는 것이 빠릅니다.
Q. 왕건이 문막 전투에서 사용한 기만전술이 실제로 효과가 있었나요?
A. 결과만 놓고 보면 효과가 있었습니다. 견훤은 견훤산성을 내주고 전주까지 후퇴했고, 왕건은 중부 지역 주도권을 확보했습니다. 섬강에 백회를 풀어 쌀뜨물처럼 위장하고 억새 허수아비를 이용해 병력을 부풀려 보인 뒤, 기병을 천마산 고갯길로 우회시킨 조합이 열세를 뒤집는 결정적 요인이 됐습니다.
Q. 섬강 이름의 유래가 궁예·양길과 관련이 있다는데 사실인가요?
A. 문막읍사에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양길 장군이 야간 행군 중 섬강을 처음 보고 '달빛에 반짝이는 강'이라는 뜻으로 '월천(月川)'이라 이름 붙였고, 이후 달을 뜻하는 두꺼비 '섬(蟾)'자를 써서 '섬강'으로 불리게 됐다고 합니다. 물론 문헌 기록보다는 구전 설화에 가깝지만, 그 이야기 자체가 이 지역이 후삼국시대의 중심 무대였음을 보여주는 흔적입니다.
결론
마을투어를 다녀온 뒤 한동안 견훤 이야기가 머릿속을 맴돌았습니다. 무자비한 군주로만 알고 있던 사람이 사실은 골품제의 벽에 막힌 시대의 모순을 뚫고 나온 인물이었다는 것, 그리고 그 흔적이 제가 수없이 지나쳤던 문막 들판과 섬강변에 그대로 묻혀 있다는 것이 새삼스러웠습니다.
견훤산성은 지금 허물어진 채로 남아 있고, 건등산 왕건진에서 나온 화살촉은 보관조차 되지 않고 있습니다. 역사는 관심을 가지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더 많이 남는다는 참여자의 말이 계속 생각납니다. 탐방로 정비와 역사공원 조성이 이루어진다면, 교과서 속 후삼국시대가 훨씬 더 가까운 이야기로 다가올 것이라 봅니다. 기회가 된다면 섬강 옆 건등산 아래서 직접 그 자리에 서보시길 권합니다.
